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태 7:16,17)

1976년 부활절을 맞아 사망권세를 파하신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목자님과 함께 하옵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먼저 목자님과 자유로운 인격적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공개서한을 보내는 불행스러운 일이 일어난 데 대해 몹시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은 여러가지로 부족한 종들이지만, 목자님께서 잘 아시듯이 그 동안 주님의 역사를 위해서 부모형제와 개인적인 꿈과 청춘을 다바쳐, 이 역사를 섬겨온 이래, 이토록 목자님께 근본적으로 불순종을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종이신 목자님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으로 믿어 왔으며,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데 저희들이 주일집회, 7년간 섬겨온 양들의 결혼식까지 포기하기까지는 아무리 목자님 보시기에 어린 종들이지만 얼마나 그간 괴로움이 많았을까 잘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음역사를 시작하시고 지난 15년간 이루신 성경읽기 역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성령으로 이루어 오신 역사임을 믿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분별력이 없는 자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후배 목자들이나 양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클 것인가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목자님! 목자님께서 76년 4월 2일 Senior목자들의 메시지 훈련 때 집에서 메시지 쓰느라고 오전 8시반까지 회관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하여 종로회관에 모여서 메시지를 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양마가 목자를 통해서 이요셉은 광주로 안 나다나엘은 대전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양마가 목자는 좀 기다려 보시오. 딴 하명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야릇한 웃을 띠며 말하는 것이였습니다. 과연 조금 있다가 이 안순 사모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메시지를 잘 쓰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훈련받게 된 동기는 이 창우 목자님께서 창세기 원고를 쓰시다가 잘 안쓰여지니까 갑자기 아침에 각 회관에 전화걸게 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전에 사모님 기도회에서 부부싸움이 있으면 목자님께서 화가나서 목자들 볼기를 때리기 때문에 자기가 조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별로 문제삼지 않았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자님께서 영적인 아버지로서 저희들을 사랑하여 주시는 훈련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자님께서는 4월 7일 아침 영어성경 참석치 않은 문제로 이요셉 목자를 명륜회관으로 김요나 목자를 서대문 회관으로 member change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8년 또는 10년간 하나님의 종이 명령하는 것에 절대순종해 온대로 이요셉, 김요나 목자는 순종하기로 마음먹었고 안나다나엘, 손마태 목자는 순종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합심기도하였고 성경읽기 역사의 현재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역사방향에 대해서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현재 성경읽기 역사에서 몇가지 문제점을 찾는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첫째는, 현재 성경읽기 역사의 존재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찾기 어려웠습니다. 지성인 복음화 운동과 세계선교라 하나 일반교회에서도 이제 모두 힘써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그 동안 훈련을 많이 받은 목자들의 영적성장이 부족하여 모두 폐인이 되어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도대체 3년전만 해도 이토록 심하지 않았는데 목자들 사이의 어떤 인격적 관계가 다 무너지고 서로 경계하고 불신하게 되고 남을 딛고 서서 자기 살기을 찾으려는 추한 현상이 어째서 생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경읽기 내부의 부패를 그간 목격하여 왔기 때문에 복음 역사를 위해서라며 어떤 범법행위도 과연 묵과되어야 하는가? 하는데 대해 전혀 성서적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마디로 훈련에 지쳤고 성경일기 역사에 우리가 계속 있어야할 분명한 의미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시대를 섬겼으니 사표를 낼 각오로 하나님앞에서 새로운 부르심을 받고자 잠시 서울을 떠나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갖기로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목자님, 저희들은 왜 우리가 이 모양이 되고 말았는가 성경읽기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단 말인가? 왜 이 역사에서 새생명을 얻었고 부르심받아 온전히 일생동안 이 역사를 목숨바쳐 섬기려고,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10년이 지난 오늘날 이토록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단 말인가? 저희들은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통곡만 계속했습니다. 앉아도 눈물이요 일어서도 눈물이요, 이제 저희들은 인생의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진리를 위해,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양떼들을 위해, 선한 목자 예수님의 생애를 본 받고자 살아왔는데 결국은 이렇게 비참하게 되어 버린 것이 슬퍼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는 당신의 종 이 창우 목자님과 후배목자들곧 남은 자를 통해 역사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물러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왔는데, 지금 죽더라도 진리를 위해 주님을 섬기는 마지막 길이 무엇인가?

자손만대를 위해 이 역사를 위해 우리가 해야할 최후의 일이 무엇인가? 찾고자 기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희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성경일기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의 모든 죄를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목자 회장이신 목자님의 지도력 아래 우리 성경읽기가 저지른 신앙적 도덕적 죄악이 무엇인가 고발하고 합심하여 새로운 역사의 방향을 찾게 되었습니다. 목자님! 저희들은 여러가지로 감정이 격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도 이제 감정을 극복하고, 개인의 유익을 떠나서 진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결단한 것이니 깊이 생각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1.      헌금관리 문제

목자님께서 잘 아시다 시피 우리의 헌금은 대부분 가난한 학생들과 아직 경제적 기반이 없는 초년 학사들의 희생적으로 바쳐진 것입니다. 과부의 두렙돈과 같이 생활비 전부를 바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헌금은 선교역사와 구제사업에 공정하게 쓰이도록 바쳐진 것입니다. 그러나 1억 5천만원을 넘게된 예산 결산을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해야할 목자님께서 혼자 비공개적으로 쓰시고 계십니다. 그 이유인즉 우리 목자들이 돈을 관리 하기에는 어리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이 귀한 헌금을 본래적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유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i) 구제 헌금 임의 유용

목자님! 74년도 성탄절 뱅글라데시를 위한 구제헌금 2천여 만원을 빼내 75년도에 관악센타를 매입하고 후에 채워넣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때 마음이 꺼렸지만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자님께서는 지난 1월 3일 이사회에서는 짓밟힌 서울대생들을 위한 영적인 구제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완전히 유용할 것을 결의토록 하셨습니다. 이 헌금은 굶주려 죽어가는 뱅글라데시 형제들을 위해 결혼반지, 목걸이, 적금통장, 혹은 교과서, 심지어 자신의 피를 팔고 등록금까지도 아낌없이 바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70년 이후 이리는 거액의 구제헌금을 했지만 71년 봄 선명회를 통해 뱅글라데시에 100만원을 전달한 것 이외는 공식적이 지출이 없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는 76년도 크리스마스에는 학생들에게 구제헌금 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코 신앙양심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서운 범죄행위는 구제헌금 유용 때문에 형사처벌을 받은 대한일보사 경우에 비추어 볼 때 일반 사회단체에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ii) 본부의 결산 장부 비공개

목자님께서는 본부결산 장부를 공개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산 때면 손마태, 이사무엘 등 실무자는 사모님이 적어준 자료에만 의존함으로 결산을 조작하여 보고서를 제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매해 상당액에 달하는 지출세목이 불명확합니다. 이사회에서도 결산에 대한 감사를 한 번도 행한 일이 없습니다. 이 거액의 예산이 감사도 없이 한 개인에 의해서 쓰여진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또한 해외에서 청춘을 바쳐가며 선교역사를 감당하고 있는 평신도 선교사들에 의해 매년 막대한 헌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헌금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액수가 얼마인지 어떻게 쓰여지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iii) 임의 경비 지출

목자님은 이사회의 협의없이 임의로 많은 부동산 매매를 하셨습니다. 또한 목자님 자신의 말씀에 의하면 1974년도 스위스 로쟌 대회에 참석했을 때 국내 교계 지도자들에게 점증하는 UBF의 비판을 무마하고자 돈을 뿌렸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목자님께서는 공식적으로 매월 10만원의 생활비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으로서는 분에 넘치게 돈을 많이 쓰십니다. 가까운 예로 금년 설날만 하더래도 세배오는 수많은 양들 모두에게 천원씩이나 세배돈을 주지 않았습니까? 양들에게 세배돈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목자님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해야할 목자회장으로써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경비 지출을 임의로 행하셨습니다. (행6:3-6) 목자님은 성경읽기의 공적인 돈을 목자님 자신의 돈인양 취급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하여 우리 성경읽기는 부패하고 타락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 성경읽기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딤전 6:10)

2.      인권 유린 행위

목자님! 목자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명분있는 일이아 할찌라도 수단으로 이용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악한 수단도 합리화하시고 인권을 특히 유린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점차로 사회문제화되기 직전에 놓여 있는 현편입니다.

(i) 폭력, 린치사건

목자님은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폭력행위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1973년 1월 서울시내가 폭설로 인해 교통이 두절되었던 때를 기억하시겠지요? 목자님은 목자회의에 지각한 이남균, 고이삭, 김요나, 손마태 등을 서로 주먹뺨을 열대씩 때려 쓰러지게 하고 혹은 귀가 다쳐 병원에 가게 하셨습니다. 또한 김모세 목자 말에 의하면 목자님은 운전수 박동진 학사를 목자님집 목욕탕에 감금시킨후 발가벗겨 얼음물속에 5시간동안 있게 하셨습니다. 유기황 형제는 선교후보 훈련 중 본래 목적에서 떠나 운전수로 쓰시다가 목자님의 말씀을 거스린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추방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남균 목자를 통해 상당한 기간동안 하루 한끼씩 먹이고 매일 몽둥이로 100대씩을 때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영양실조와 공포심 때문에 결국 그는 폐결핵을 앓게 하셨습니다. 또 장만석 목자는 아무 이상없는 발톱을 두개나 뽑게 하셨습니다. 또한 NMC의사 선우 형식을 목자님 자신이 종로 학사회관에서 양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하셨습니다. 또한 75년 9월 CNF선교 보고의 날 장만석 목자를 시켜 김기초 선교후보를 폭행케 하여 얼굴에 타박상을 입히고 귀에 상처를 입게 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역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이 어찌 이것들 뿐이겠습니까? 목자님! 이런 일들은 예수님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일들입니다. 또한 피해자가 고발할 경우 성경읽기는 사교로 몰릴뿐만 아니라 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범법행위가 아닙니까?

(ii) 정략적인 결혼 강요

목자님! 결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어떠한 목적으로도 이용될 수 없는 신성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또한 배우자 간의 순수한 자유의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목자님께서는 75년 가을학기 목자 수양회에서 미혼 목자 후보들에게 나는 서독선교사의 남편이다라고 선서하도록 강요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약혼자가 있는 후보들에게까지 그렇게 하셨습니다. 물론 나이많은 노처녀 선교사들의 목자심정에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되지만 그 실제에 있어서는 선교사들의 충성심을 고무시키고자 하는 정략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또한 김정진 목자 후보는 목자님께서 지정한 선교사와 결혼 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 즉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2초가 늦었다는 이유로 김삼년으로 이름을 바꾸고 3년동안 결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대문 센터 홍응표 형제는 이미 약혼한 형제입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이것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강요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자 아나니아와 삽비라로 몰아 쫓아 내셨습니다. 심지어 김숭흠 선교후보의 경우는 더욱 잔인하십니다. 목자님 임의로 소정화 자매와 결혼하도록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정화 자매가 거절하자 또 다시 이 준로(호?) 자매와 결혼하도록 종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때 김숭흠 형제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이것이 무슨 하나님의 뜻인가? 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선교사로 시카고에서 온갖 충성을 하지만 선교사로 인정하지 않고 계십니다. 또한 종로 학사회 항우여 서울지법 판사는 목자님께서 지명한 자매와 결혼을 강요당하자 이에 반발하고 떠났지요? 또한 관악센터 김상봉 형제가 전소원 자매와의 결혼을 거절하자 믿음이 없다고 정신적 학대를 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읽기의 모든 미혼 형제 자매들은 목자님께서 명하시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경우 분순종의 죄인으로 몰리게 되고 결국 견디다 못해 떠나곤 합니다. 결국 성경읽기의 대부분 결혼이 정략적입니다. 충성된 회원을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재는 사회의 많은 지탄을 받고 신문지상에까지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성서적인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신성한 결혼의 자유를 박탈하는 죄악입니다.

3. 사기 및 절도 등 범법행위

목자님! 기독교는 사회윤리와 도덕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마5:20) 그러나 목자님께서는 복음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윤리도덕의 모순을 초월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성서적인 철학은 많은 범죄행위를 합리화 시키셨습니다.

(i) 절도 행위 강요

목자님은 선교훈련이라는 미명아래 수년간 다른 사람을 시켜 선교후보의 여권을 절도케 함으로 출국을 막으셨습니다. 그 피해자는 이영옥, 허필순, 김덕기 등의 선교사입니다. 또한 선교훈련을 기피할 우려가 있는 정준기 선교후보의 페티션(노동허가서)을 강제보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독교인으로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입니다.

(ii) 허위문서 조작 및 뇌물공여

목자님께서는 1975년 12월에 목자님 명의로 된 싯가 2천 5백만원 상당의 관악센터의 양도 소득세가 너무 많다고 이 건물을 단체명의 소유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본회의 명칭을 임의로 편시도 복음선교회로 바꾸고 이요셉, 안나다나엘, 김모세, 주마리아 등의 이사를 새로 선임한 후 교묘하게 지방법원의 명의 변경판결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화공보부에 등록이 안 된 평신도 복음선교회 소유의 상기 부동산을 등기하기 위하여서 세무공무원 및 등기소 직원에게 뇌물을 공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세금을 포탈하셨습니다. 지성인들을 진리로 지도해야할 본 회에서 이와 같은 범법행위가 양떼들이 모르는 가운데 성경읽기의 최고 지도자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꼭 이런 일을 하면서까지 그런 건물을 소유해야할 필요가 있습니까?

(iii) 가정을 파괴하는 언동

목자님은 목자님의 가정은 지나치게 보호하면서도 목자나 학사들의 가정을 파괴하는 일을 예사로 하셨습니다. 가정은 사회, 국가, 민족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됩니다. 더욱이 신장들의 가정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은 거룩하고 또 인격적이고 누구에게 침해되서는 안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가정의 머리가 되시고 그 가정을 주관하셔야 합니다.(엡5:30-33) 그러나 목자님께서는 양떼들의 가정을 지나치게 간섭하시고 파괴하는 일을 예사로 하셨습니다. 목자훈련을 명목으로 이바울 목자에게는 아내가 이혼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선교정책을 위해서 이사무엘 목자에게 자식을 고아원에 보내고, 아내는 미국에 보내고 이 사무엘은 광주에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서진태 목자의 동역자 서경희 사모님의 경우는 학사회장 사모님의 자격이 없다고 피할 수 없는 압력을 넣어 미국에 보내시고 거의 1년간 별거생활을 강요하지 않으셨는지요? 또한 고이삭 목자에게는 부부생활의 절제훈련이란 명목으로 회관에서 취침하여 별거토록 강요하셨습니다. 그외에도 여러 목자들에게 아내를 멀리하라, 이혼하라는 명령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목자님께서 중매하시고 주례하신 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그냥 넘겼지만 이러한 일을 당하는 본인들에게는 참으로 견기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비성서적인 교육방법

목자님, 성경읽기의 교육방법은 예수님의 제자양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방법은 그 기초가 인격적인 감화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교육방법은 성서에서 떠난 점이 많습니다.

(i) 강압적인 회개: 목자님! 목자님께서는 장석조 선교후보에게 눈에 고추가루를 뿌려 눈물을 흘리게 하고 이마를 벽돌에 찧게 하여 인위적으로 회개하도록 압력을 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자님 앞에서 형식적인 죄는 고백했으나 회개는커녕 오히려 앙심을 품고 미국에 간후 편지 한장이 없습니다. 그외에도 몽둥이로 때리거나 위협을 가해 회개토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비인격적인 강압적 회개를 통해 진정한 회개를 한 예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훈련을 받고 외국에 나간 선교사는 하나같이 다 삐뚤어져 버렸고 본국의 목자들은 더 이상 참기 힘든 지경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하시는 일이 아닞지요?

(ii) 자아비판을 강요하는 소감발표

목자님! 소감발표는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자신의 문제해결을 위해 좋은 교육방법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개인의 자발성을 박탈하고 강제소감을 발표케 하여 죄를 고백케 하셨습니다. 또 양들이 죄를 고백하면 오히려 그것을 약점으로 잡아 괴롭히고 또 약점이 있는 양들은 어쩔 수 없이 목자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또한 안이숙 사모님에게 결혼 전에 강제로 애정고백서를 수차례 쓰게 하신 사실은 심한 정신적인 학대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iii) 강의안을 통한 개인사상 주입

목자님! 기독교 복음전파의 중심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지난 수년간 창세기 1:1역사와 창세기 대회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목자님이 쓰신 강의안에만 의존하도록 강제 유도해 왔습니다. 일용할 양식 책자가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지나치게 성경의 일부분만 강조하여 성경진리의 보편성을 상실함으로 이단의 수법이라는 오해를 유발했고 양떼들에게 복음을 심는 데 사실상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수년가 각지구 회관 역사는 복음의 기초가 빈약해졌습니다. 이것은 결국 성경읽기 교육방법이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복음전파방법이 아니라 목자님 개인사상을 주입시켜서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사상세계를 통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회관의 양떼들의 신앙 성장을 저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iv) 비인격적인 목자 훈련

목자님! 성경읽기가 성장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 목자들이 많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합니다. 또한 목자님께서 목자들의 훈련에 많은 관심을 두어오신 것이 사실입니다. 목자님께서는 CNF수양회 이후에는 목자 훈련관으로 전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친히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목자 훈련관이라고 자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그런 훌륭한 스승을 가진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목자님의 훈련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목자님게서 가장 유능한 인재를 뽑았다고 자부한 우리들, 또 목자님의 그 훈련을 마음으로 받아드리기 위해 온갖 회선을 다한 우리들은 목자님의 말씀대로 쓸모없는 자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그 훈련 방법에 있어서 어떤 맹점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지성인의 목자 훈련은 인격적이며 자율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러나 목자님의 훈련 방법은 영적인 훈련이 되지 못하고 비인격적인 폭언과 구타 등 각종 고문행위와 정신적 학대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목자님은 그 동안 한 사람의 성장을 위해서 깊은 관심과 대화와 해산의 수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각 개인의 개성과 은사를 살려주지 못하셨습니다. 모두 획일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자의 실수가 발견되면 그 원인을 찾아서 도와 주시기보다 책벌로서 훈련을 시키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매를 때려 육체적 고통을 주거나 양들 앞에서 때려 인격을 모독하고(장만석) 동역자들 가운데서 고립시키므로서 정신적인 타격을 주셨습니다. 또한 벌금과 감봉으로 위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훈련을 받는 우리들은 자기문제를 깨달아 성장하기보다 공포감과 죄의식, 수치심과 자책감으로 깊이 절망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한 목자님은 어떤 훈련기준이 없으십니다. 안순사모님께서 사모님 모임에서 하신 말씀에 의하면 부부 싸움을 하시거나 사모님께서 목자님을 잘 내조하지 못할 때면 꼭 목자들이 빳다를 맞기 때문에 목자님을 돕는데 온갖 신경을 쓰신다고 하였을 때 목자님을 스승이요 영적 아버지로 존경해 왔던 우리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목자님! 이런 비인격적이고 획일적인 훈련 방법으로서 성장한 목자가 누구입니까? 오히려 목자님의 훈련을 받을수록 우리는 삐뚫어지고 폐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진화 목자는 목자 모임에 참석해서 말한마디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돌아갑니다. 남균 목자님은 거의 소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김요나 목자는 완전히 의욕상슬증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이 모든 문제가 단지 우리들이 똥통대학 출신의 저질이기 때문이며 교만하고 게으르고 기본자세가 안되어 있기 때문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훈련관인 목자님 자신의 인격에 대해서는 생각하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훈련의 표준은 목자님과 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며, 훈련의 목적은 목자님에게 절대 맹종하도록 하려는 것 밖에는 달리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훈련을 받아 성장할까 하는 생각보다 어떻게 폭력과 고문을 당하는 훈련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소극적인 생각과 언제쯤이나 이 신세를 면하나 하는 운명적인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마디로 목자님의 훈련을 통해서는 저희가 성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사업을 위한 도구로 쓰기 위해 쓸모없는 자로 만드는 정신적 살인행위로 밖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자님! 저희들은 이제 목자님의 훈련에 지쳤습니다. 훈련이 목적하는 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기 보다는(히12:11) 불안과 공포와 거짓과 상호불신 등의 악령의 열매를 더 많이 맺게 되었습니다. 목자님! 정말 답답합니다.

5. 이 창우 목자님 개인 중심한 역사체제

복음역사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만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성경읽기 역사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이 창우 목자님 개인중심의 역사 체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i) 이사회 기능 마비

이사임명은 현재 이창우 목자님 개인 임의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사회의 주요기능은 예산, 결산 심의와 감사입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목자님의 권위를 이용하여 장부공개를 거절하는 등 이사회 기능을 말살하셨습니다. 또 의결방법도 자유로운 의사표시와 반대의견을 제출할 수 없이 목자님 의도하는대로만 결정했습니다. 이사회에서 이미 의결된 사항도 이 창우 목자님은 임의로 변경하므로 사실상 이사회는 유명무실한 꼭두각시 모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한 예로 1976.1.3 정기 이사회에서 목자님은 1974년 뱅글라 데쉬 구제헌금 2천여만원을 임의로 관악회관 매입에 유용한 후, 이것을 영적구제라는 명목으로 인준을 강요하여 일방적으로 통과케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황익근 이사가 사퇴하는 동기를 주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일단 결정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1976.4.10이사회에서는 실무이사 5명이 불참한 다운데도 이사회를 강행했고 이미 유용한 구제헌금을 해외선교헌금으로 임의충당하여 죄를 은폐하므로 이사들은 농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정규해 이사장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장 목자를 비밀리에 이사장으로 세워 관악회관 등기이전수속을 하였습니다. 이 사실 한가지만 보더라도 현재 성경읽기 이사회는 목자님이 절대 신임을 받는다는 착각으로 목자님 개인의사에 의해서 좌우되는 허수아비 회의가 되어있습니다. 그결과 이창우 목자님은 성경읽기의 재정권과 인사권을 독단적으로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목자님이 여러가지 죄를 범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ii) 목자 회의 독재성

처음 저희들이 목자로 부름 받았을 때 저희들은 부족하지만 초대교회 사도들과 같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모임인 목자 모임을 기다렸고, 생명을 바쳐 일하는 동역자들을 만나는 그 모임을 그리워했습니다. 거기에 참석하면 성령의 위로와 새힘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목자님의 메시지가 그리워서 월요일만 되면 만사를 제쳐 놓고 먼지방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무릎쓰고 다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현재 이창우 목자님은 목자 회장으로서 30여명의 목자들의 각종회의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 운영방법은 지성인의 목자들의 모임으로서 전혀 대화나 의논이 없이, 목자님 자신의 생각을 주지시키는 데 그쳤습니다. 목자님 임의로 인사권을 행사하여 일반목자와 간부목자를 채용, 해고, 인사이동을 단행하셨습니다. 또한 생활비의 감봉, 상여금지급 등도 그때 그때 자의로 하셨습니다. 이러한 독자적인 운영방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아 가족과 개인적인 꿈과 청춘을 모두 바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목자들을 이 창우 목자님 개인에게 예속화시키는데 악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성인 복음사업을 위해 헌시코져하는 김길수, 송안나, 양마가 목자 등을 이창우 목자님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노동력착취까지 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희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부르심의 뜻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각종 폭행 때문에 목자들은 항상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월요일만 되면 오늘은 또 무슨 구타 훈련에 걸리지 않을까? 하고 아침부터 가슴이 떨리고, 점심을 굶고 참석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또 목자님은 성령의 역사보다 사람수와 헌금액수에 치중한 보고서를 제출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허위 보고서 작성을 유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이것은 허위보고서를 쓰는 목자자신의 용기부족이라고만 단정하기에는 목자회의는 그 운영에 지나친 독재성가 공포분위기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척기부터 모든 것을 바쳐 10년 동안 봉사해온 목자들의 진심을 짖 밟고 이요셉은 성경읽기를 떠나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 또 어떤 목자에게는 하나님께 손해만 끼쳐온 마이나스 목자다 는 등 입에담기 힘든 말을 공공연히 했습니다.

목자님! 이런 말씀을 하는 지도자 아래서 어느 누가 일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동역자들의 기도까지 판단하시고 훈련이란 명목으로 진리에 벗어난 행동을 하시므로 목자들에게 견딜 수 없는 치명타를 가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의 약점을 주로 캐 내어 다른 목자를 통하여 훈련을 시켜 목자 상호 간에 불신과 경계와 원맺기를 일삼아 왔습니다. 그 결과 목자회의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사도회의와 같은 셩격에서 크게 어긋나 명령과 굴종만이 있는 모임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한마음과 한 뜻으로 결속되나, 사탄이 역사할 때 거기에는 분열과 공포심 밖에 더 기대할 수 있습니까? (행 4:32)

목자님! 저희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부족하고 사상성이 빈약하고 역사관도 희박한 점이 많습니다. 또한 진리를 사랑하지 못한 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간 목자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만 생각해봐도, 또한 위의 사실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재 우리 성경읽기가 진리의 영에서 떠났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간 하나님께서 이 창우 목자님을 통해 성경읽기를 놀랍게 쓰셨고 축복해 주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속대로 구제헌금을 지출하지 않기 시작한 지난 수년간을 돌이켜 볼 때 우리 성경읽기는 마치 도적의 굴혈과 같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화상을 당하신 후 변화된 목자님의 내면을 믿었기 때문에 목자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목자님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줄로 믿었습니다. 또한 그 동안 성경읽기를 통해 이루어 주신 역사를 볼 때 어떤 모순을 감당하더라도 목자님이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길이라고만 생각해 왔습니다. 지난 한 주동안 우리는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 모세를 거역하는 고라 자손과 같지 않는가도 성경속에서 찾아서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 또한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우리를 키워주신 목자님을 배반하는 것은 영적인 아버지의 은혜를 모르는 배신행위가 아닌가도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비참한 분열의 역사를 되풀이 해온 이 땅에서 어찌하던지 지도자를 세워서 합심하여 역사를 감당해야 하지 않은가도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진 때 성경읽기가 무서운 사회문제화 될 것이 분명한 데 이것은 결국 성경읽기 역사를 망치는 길이요, 양떼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닌가 왜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뿐만 아닙니다. 이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회개하고자 할 때 저희들 자신도 죄로 깊이 병들어 있어서 마치 칼로 자신을 난도질 하는 것 같은 죽음을 맛봐야 햇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이 전에 자주 저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성경읽기가 진리에서 떠났다면 없어져도 좋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레미야 7장에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면서도 여호와의 전에서 갖은 불법을 자행하며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전을 실로와 같이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흩으시고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 역사에 진리가 떠나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공의가 없을 때 친히 언약궤를 이방인에게 넘겨 주시고 몸된 성전을 헐으시며 그의 백성을 진멸하셨습니다. 진리가 없는 역사는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진리가 없는 역사가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우고 순진한 양떼들은 이용당합니다. 저희들은 현재 성경일기는 목자님 한 분이 개인 우상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개인의 영광만 나타나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인위적인 역사요 사단이 난무하는 역사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주님께서 요한복음 8:44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입니다. 목자님이 하시는 말씀은 그때 그때는 옳은 것 같으나 종합해보면 신앙지도자로써 거짓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성경읽기는 현재 빛의 역사, 진리의 역사가 아니라 너무 어두운 점이 많은 비공개적이고 비밀이 많은 사기단체라고 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1요1장) 공의에서 떠났습니다.(마23장) 적어도 10여년간 가장 가까이서 목자님의 인격과 생활을 접해온 우리가 목자님을 깊이 신뢰하지 못하고 더 이상 르호보암과 같이 다스리시는(왕상 12장) 목자님 아래서 죽어도 일할 수 없다고 결론 맺게된 것 자체만 해도 비극입니다. 또한 성경읽기는 그 동안 많은 영혼을 살리는 성령의 역사였으나 근래 목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을 이용하다가 버리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리고 목자님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살리는 일이라기 보다 죽이는 일같이 여겨지는 것은 저희들이 사단이기 때문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976년 4월 14일 저희들이 대전근방에서 모여 있는 것을 전요한 목자님들을 통해 전해 들으신 후 안나다나엘 목자 가정에 행하신 사건만 보더라도 목자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순종하기 어려운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목자님은 고이삭 목자가정을 안나다나엘 목자 주택에 대신 보내시고 출산 예정일을 이틀 앞 운 강성애(안이숙) 사모님과 만 3년생 다니엘과 만1년 2개월된 철부지 이숙이를 보호자인 안 나다나엘 목자가 없는 가운데 경기도 교문리로 강제추방시키셨습니다. 목자님께서 수주전 종로학사회에서 공표하셨듯이 안 나다나엘 목자는 목자님의 후계자로 인정받을 만한 영적인 하나님의 종입니다. 아니 잠시 그가 사단에 미혹되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목자님께서는 자신의 목적하신 바 역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라는 만삭된 연약한 여자와 순진한 어린 것들을 미끼로 이용해도 목자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잇습니까? 또한 목자님은 안나다나엘 목자가 없는 사이 한양회관에 김모세, 고이삭, 김길수  목자들을 대신 보내서 강제 점령토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님을 배우려는 어린 한양회관의 형제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실족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소자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트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8:16) 그리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요10:11) 또한 성령의 역사는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있다 하더라도 비록 안나다나엘 목자를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요 복음역사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진리에서 떠난 행위가 합리화 될 수 있겠습니까?  약자를 이용하는 것은 사단이라고 목자님은 저희들에게 창세기 3장과 요한 8장을 근거로 얼마나 많이 가르치셨습니까? 인간적으로 지고 신앙적으로 이기라고 얼마나 많이 가르치셨습니까? 서로 화해시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목자님이 하셔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결국 김모세, 고이삭, 김길수 목자들을 목자님의 정략을 위해 서로 원수 맺게 하는 일을 하고 계시며 10여년간 이 목자, 저 목자를 후계자 시키겠다는 암시를 주어서 서로 신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목자님께 예속 시키고 목자들 사이에 분열만 조장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억설일까요? 적어도 후계자 훈련을 받아오던 김요나, 이요셉, 안나다나엘, 손마태 목자가 목자님의 하시는 방법이 전혀 비신앙적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면 이미 나이 35세가 넘고 목자생활 10년이 되는 우리가 반드시 어리고, 교만하고, 배우는 맘이 없고 저질이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안 나다나엘 목자나 다른 목자들이 모두 목자님을 반역하고 역사를 파괴하는 사단노릇을 하고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자님께서 그토록 살인적인 행위를 하실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자체가 바른 길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목자님께서는 늘 하나님의 역사는 모세같이 또 사무엘같이 사람을 죽여도 괜챦고 어떻게 이요해도 좋다는 신앙철학을 기초로 일해 오신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 이요셉 목자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김요나가 자살해도 좋다고 까지 말씀한 적이 있으셨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이요셉을 몰아내야겠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안 나다나엘을 없애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장만석 목자나 이바울 목자를 언젠가는 없애려고 하실 것이 분명하지 않다고 어찌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목자님이 행해오신 것은 전혀 하나님을 배우신 것도, 예수님을 배우신 것도, 믿음의 조상 모세나 다윗을 배우신 것도 아니라는 것 밖에는 달리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우상을 섬긴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나 가장 책임이 큰 가까운 동역자 아론 만큼은 용납하지 않았습니까? (출 32장) 오히려 모세는 죄 범한 백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해도 온유한 모세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자신은 직접 그들에게 보복행위나 훈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들을 문둥이 되도록 심판하셨습니다. (민12장)

목자님께서 이토록 친히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목자님의 위치가 하나님과 동등되다고 하면 우리가 지나치게 판단한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은 자식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 오히려 자신이 피했습니다. (삼하 5장)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에 맡겼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치셨을 때 다윗은 얼마나 슬퍼했습니까? 오히려 집나간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눅15장) 또 예수님께서 수제자 베드로가 인간적이기 때문에 사단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배반한 제자를 다시 찾아가서 사랑으로 돌이키지 않으셨습니까? (요 21장) 또 사도 바울도 제자들을 눈물과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행20장) 비록 우리가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목자님께서 왜 좀 기다리시며 한번이라도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시면서 도와 주실 수 없으신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10년간 언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리 철없는 자들의 말이라도 한 번쯤 귀 기울여 주시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런분을 영적 아버지로 믿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저희들은 오랫동안 목자님이 성경읽기의 영적 아버지라는 신앙적 오류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목자님은 스스로 성경읽기의 영적아버지, 스승, 지도자로서 절대권위를 행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만이 우리의 선생이요, 아버지요, 지도자이시며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한 형제입니다. (마태23:8-11) 물론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적이 있고 질서 유지를 위해 목자님을 형제로서 보다 아버지로 세워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미 평등관계과 파괴된 채 영적 아버지 운운하는 것은 목자님과 그외 모든 성경읽기 회원을 상하관계, 또는 주종관계로 만드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목자님은 더욱 교주와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위치로 우상화되었고 그 결과 성경읽기에는 사단이 크게 역사하는 증거가 많아졌습니다. 결국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목자님의 언행은 거짓이요, 살인적이요, 두려움을 주는 악령(롬8:15)에 매여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목자님! 저희들이 어떤 정치적 목적에서 반역하고 있다고 단정하시거나 어느 한 목자의 주동으로 유혹받아 행하는 사단들이라고 단정하시기 전에 우리 죄를 하나님 앞에서 함께 회개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근래 성경읽기가 점차 출발과 끝이 다른 이단종파로서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것을 목자님은 잘 아십니다. 목자님은 이것이 곧 성경읽기가 철저하다는 말이다고 좋게 해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목자님께서는 그들을 깎아내리면서도 돈과 강의초청으로 교계지도자들에게 아첨하고 계십니까? 저희들 보기에는 결국 성경읽기의 죄악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행하는 기만행위라고 밖에는 달리 납득이 안갑니다.

저희들은 결코 더 이상 하나님의 역사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모든 죄악을 비굴하게 묵인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점차 이 창우 목자님 개인 우상화 때문에 사단이 난무하고 양떼들이 이용당하는 죄악된 역사를 방관할 수 없습니다. 이창우 목자님께서 회개하고 대학생성경읽기 선교회에서 자진 명예롭게 퇴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길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진리의 길이며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한 영원한 하나님의 역사를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은 목자님을 위하여 계속해서 상한 시미정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또한 목자님께서도 여러가지로 부족한 저희들이 이 역사를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계속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한 인간인 이창우 목자님이나 부족한 인간들인 저희가 승리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만유의 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기만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1976년 4월 15일

이 사무엘
정(장?) 바나바
서 베드로
안 나다나엘
손 마태
이 요셉
김 요나 올림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 역사 방향

본 회는 이상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역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역사 방향을 제시합니다. 또한 아래에 제시한 방향을 기초로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 정관을 제정하고자 합니다.

전체방향: 인위적인 1인 독재 체제에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자율적인 협의체제로 바꾼다.

1.      체제운영:

(1)     획일적이고 인위적인 중앙집권 체제에서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지구자치제로 바꾼다.(엡2:21,22)

(2)     각 지구는 담당목자의 책임하에 운영하며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의 협의체를 구성한다.

(3)     해외 각지구는 자치제로 운영한다. 각 지구 세계선교부에서 본국의 선교사 교육, 양성을 위해 보내는 헌금은 본국 사무부 경리과로 보낸다.(롬15:25,26) 개인이 본국의 출신지구로 보내는 헌금은 자율적으로 한다.

2.      이사회 기능강화: 이사회의 권한을 강화하여 각 지구 및 본부 예산, 결산의 심의권, 감사권과 인사인준권을 부여한다. (행20:28)

3.      사무직 분리: 본부의 예산 결산, 금전출납 및 재정관계 사무는 사무직원을 따로 두어 담당시킨다. (지금까지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해야할 목자 회장이 금전출납을 도맡아 임의로 결정, 집행하였음)(행6:3-6)

4.      목자,선교사 교육: 비 인격적인 육체훈련을 일체지양하고 영적감화에 의한 교육을 중점으로 한다. (딤전4:7,8)

5.      인사관리문제: 목자의 인사관리는 인사관리 위원회에서 관장한다. (지금까지는 목자 회장 1인이 임의로 결정하고 관장하였음)(행1:15-26)

6.      사생활 보호: 어느 누구로부터 어떤 모양으로던지 목자나 학사가정의 사생활은 간섭받지 않는다.

출처: https://web.archive.org/web/20071025002543fw_/http://ubf-info.de/int/ref1/openletter1976.kr.htm